목공의 역사
목공(木工)나무를 이용하여 건축 및 물건을 만드는 목공 및 그 제품의 총칭.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각종 건물과 가재도구의 대부분을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궁궐이나 관아렌玲� 같은 공공건물을 비롯하여 모든 사사로운 주택이 목조건물이므로 그 안에 비치하는 기물에 목제품의 비중이 늘게 마련이다.나무를 많이 다루는 생활여건에 따라 갖가지 민구(民具) 역시 나무로 제작하는 것이 순리적이며, 따라서 목재를 다루는 솜씨 또한 일찍이 발달되었다. 목재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기물을 제작하는 기술자를 목수(木手) 또는 목장(木匠)이라 부르고, "지위" 라는 존칭어로 불러 주었다.고려 시대는 일의 분업화에 따라 이미 어용기완(御用器玩)을 도맡아 제작하는 소목장(小木匠)을 따로 두었는데, 그러한 전문성이 오늘날 목수를 대목(大木)과 소목(小木)으로 대별하게 된 것이다.즉, 대목은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는 등 건축상의 큰 뼈대를 짜는 목수를 지칭하며, 소목(小木)은 창문과 난간과 설단(設壇) 등 잔손질이 많이 가는 부재(部材)를 다루거나 또는 이동식 시설이나 세간을 다룬다. 따라서, 노련한 대목일수록 자부심을 가지고 소목 일을 거들떠보지 않으며 먹줄과 대자귀가 그의 기본연장이다.그에 비하여 소목 일에 우선 필요한 연장은 톱과 대패이다. 대목과 소목은 기본적인 분류이고, 큰 공사에서는 분업화 되어 일을 하지만, 향촌의 일반 주택에서는 대목렐恬炷� 가리지 않고 목수는 여러 가지 일을 다 하였다.
[범위와 특징]
≪산림경제≫에 따르면, 일반가정에서 갖추어 놓아야 할 생활용품 가운데 목죽제품의 비율이 도자기와 금속제품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체 목록의 40%를 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목재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거공간이 석조나 벽돌건물인 외국과는 달리, 우리 나라는 목조건물에다 온돌을 발달시킨 평좌식(平坐式) 생활을 해왔으므로 더욱 특징 있게 발달되었다.즉, 우리의 목공은 아담하고 따사로운 주거의 분위기에 맞도록 단순화시키면서 허식을 피하고 절제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장식성의 과다 현상은 한 시대의 유행이거나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필요에서 우러난 아름다움은 시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형성되는 것이다.우리 나라에서는 풍토의 제약으로 인하여 목재로 활용되는 수종(樹種)은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으며, 가장 흔하게 쓰이는 소나무는 건축목재로서 적당하지 않다. 느티나무럽으㉢すシ들메나무렵貪립す� 등은 무늬 좋은 목재로, 가래나무렝뵉潟すシ오동나무렷풍す� 등은 판재로, 참죽나무레건し뭄すシ버드나무 등은 야물고 질긴 목재로, 먹감나무레蘊すシ박달나무 등은 특수용재로 사용된다.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전나무렉克嗾すシ이깔나무 등이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나 근세에는 희귀 수종이 되었고, 화류렸域柄침향목 등은 삼국시대부터 엄격히 규제된 수입 목재였다. 일본에 흔한 가구재(家具材)도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 많다. 따라서, 각기 자기 고장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목공이 발달하였다.
(1) 삼국 시대우리 나라의 선사시대 목공는 거의 자료가 없어 살펴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것을 통하여 비로소 접근이 가능해진다. 낙랑고분의 유물을 통하여 고구려의 목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며,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풍속적인 내용이 많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수레와 평상(平床) 등의 목제품을 엿볼 수 있다.안악(安岳)제3호분과 쌍영총레タ允� 등에서는 수레의 모양이 다양하게 보이고, 그 밖에 덕흥리(德興里)고분과 감신총(龕神塚)렇탈湲?營택� 등에서 나지막한 평상이 보인다. 이는 고구려의 왕이나 귀인들이 평소 사용하였음을 예시하는 것이며, 고분 양식과 더불어 한당(漢唐)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2) 통일신라시대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에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는 사회의 요직에서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당시의 목수는 비록 말단에 불과할지라도 관직의 서열에 올라 있었음을 보게 된다. 물론, 목공기술이 지배계급의 위계에 낄 수는 없었겠지만, 해당 분야의 원로 기술자 내지 실무 감독직으로서 대우받았다.
(3) 조선시대조선 시대는 유학사상을 정치 및 사회이념으로 삼아 풍요롭고 사치하는 풍조가 제약받게 된다. 그리고 억불정책(抑佛政策)에 따라 사찰 수공예가 대폭 위축받게 되어 기술의 쇠퇴와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다.그런 여건에서는 장인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민중의 미의식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터전을 만들 수 없으므로 민중 속에 잠재된 소박한 미의식이 뚜렷한 성격으로 움트게 마련이다.조선 시대 목공의 미는 일체의 인위적인 장식성, 인위적인 조형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간결한 선(線), 명확한 면(面), 그리고 목재 자체가 가지는 자연목리(自然木理)의 미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 낸 점에 특징이 있다. 이러한 지적은, 신라럭疵� 목공이 귀족적임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목공은 민중적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한 것이다.그리고 17세기를 전후하여 새 시대의 기풍이 일어나 선비문화가 선명해지는 까닭에 가정 내실과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사랑 내지 서재가 기능적으로 엄밀하게 분리되어 그 나름으로 성격을 굳혀 발전하게 된다.또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에 따라 대범하고 소탈하게 제작함으로써 우리 나라 목공의 개성과 미가 창출되게 된 것 입니다..